2012년 12월 27일 목요일

내년 1월부터 관광객에게 영구보존 된 김정일 시신 관광객에 공개


내년 1월부터 전 북한 김정일 국방위원장 시신을 외국인 관광객에게 공개할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중국에 사무실을 둔 한 북한 전문 관광 여행사 홈페이지에서 북한이 다음 달 김일성 주석과 김정일 위원장 시신이 안치된 금수산태양궁전을 외국 관광객에게 개방할 것이라고 밝혔습니다.

지난 19일 북한 매체는 김정은 노동당 제1비서가 김 위원장 1주기를 맞아 금수산태양궁전 참배하는 모습을 방영했지만, 시신 모습은 내보내지 않았습니다.

북한은 김일성 주석이 사망한 뒤에는 1주기에 당시 이름으로 금수산기념궁전을 개관하고 간부와 군인 등에게 김 주석 시신을 공개했으며, 사망 2년 뒤에 일반인에게 완전히 개방했습니다.

이제 미라화된 김일성 주석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시신이 외국인 관광객에게 공개 된다는데 여러분도 가보고 싶지 않은가?

2012년 12월 26일 수요일

귀농하면 3천만원 지원하는 동네...

귀농귀촌 인구가 매년 최고치를 기록중입니다. 2012년 상반기 귀농귀촌인구는 8706가구 1만7745명에 이릅니다. 이들은 왜 도시를 떠나 시골로 향하는 것일까요? 귀농귀촌인 절반 이상은 4050세대이지만 2030 세대의 귀농귀촌도 늘고 있다고 합니다. '생태적 삶'을 살고자 귀농을 결심하는 이들도 많지만, 상당수는 자영업에 실패하거나 명퇴를 당했거나 도시생활에 지친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시골에 가서 농사나 지어야겠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현실은 만만치 않습니다. 이에 <오마이뉴스>는 귀농귀촌의 리얼스토리를 들려드리려 합니다. 개인의 선택 차원을 떠나 뚜렷한 사회현상이 되어버린 귀농귀촌에 대한 실질적인 사회적 뒷받침이 이뤄지는 계기가 되길 바랍니다. [편집자말]
도시는 점점 살기 힘든 곳이 되는 걸까? 도시인들이 귀농하고 있다... 그중에서도 전남 강진구로... 
전남 강진군이 최근 들어 귀농 1번지로 급부상하고 있다. 왜일까? 

강진은 귀농 1위 지역인 전남 내에서도 가장 귀농비율이 높은 곳이다. 예전에는 중앙정계에서 밀려난 지식인들의 험난한 유배지로 악명 높았던 강진이, 지금은 귀농인들의 아늑한 유토피아로 떠오르고 있는 것이다. 남도의 한적한 시골 군지역이 귀농희망자들의 관심을 받기 시작한 이유는 무엇일까. 

거기에는 전국 지자체중 가장 큰 액수라는 귀농정착지원금 '삼천만원'이 큰 몫을 했을 것이다. 그러나 비단 삼천만원이라는 정착지원금 때문에 사람들이 강진을 귀농 대상지로 선택한 것일까. 강진군만의 특별한 귀농정책이 궁금했다. 

강진군이 귀농 1번지 된 이유

"귀농 1번지요? 너무 거창한데요? 허허, 자꾸 그렇게들 말씀하시면 쑥스럽습니다."

취재도움을 받기 위해 전화 통화를 하게 된 강진군청의 담당 주무관이 쑥스럽다는 듯이 웃으며 말했다. 강진군이 귀농 1번지로 알려지면서 담당 공무원들은 업무량 폭주로 늘 분주한 모양이었다. 

강진군청의 몇 년간에 걸친 꾸준한 귀농정책 덕에 강진군에는 매년 1백여 가구씩 인구가 증가하고 있다. 보통 한 가구가 귀농할 때마다 평균 3명 정도가 새 인구로 유입된다. 전체 인구가 4만 여명에 불과한 시골 군단위에서 매해 100여 가구(삼백여 명)의 인구가 증가하니 고스란히 면단위 하나가 만들어지는 효과가 나온다. 더군다나 올 한 해에는 그  어느 해 보다 귀농이 활발했다. 연말이 지나고 나면 강진군의 귀농으로 인한 인구증가는 더욱 뚜렷한 상승곡선을 보이게 될 것이다. 

강진군의 귀농에서 두드러지는 점은 출향인들의 귀향보다는 타 지역 출신자들의 귀농이 유난히 많다는 사실이다. 강진과는 아무런 연고가 없는 희망자들이 귀농지로 강진 지역을 선택했다는 사실은 강진군의 귀농정책이 귀농인들의 욕구를 충족시키는데 어느 정도 영향을 미쳤다는 것을 증명한다.    

젊은 귀농인 권민도씨도 그런 생면부지 강진으로 귀농한 사람 중 한 명이다. 

▲  귀농 2년차 권민도씨.
ⓒ 권민도

넥타이 인생 버리고, 강진에서 오리 키워요

38살이었던 권민도씨는 2010년, 서울에서 강진으로 귀농했다. 그의 현 거주지는 군동면 용소리. 도시에서 하얀 넥타이를 매고 금융업에 종사하던 젊은이가 지금은 강진의 한 시골 오지에서 작업복에 장화를 신고 오리 축사를 둘러보고 있다. 인가에서 한참 떨어진 골짜기의 총면적 3200평, 총 5개동 규모에 달하는 축사에는 오리들이 무리지어 놀고 있었다. 

"고액연봉에 길들여진 채 자본주의 병폐에 깊숙이 병들어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한 뒤 그 깨달음이 너무 충격적이어서,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바로 사표를 썼죠."

당시 권씨에게 귀농이란, 돈의 유혹과 사람사이의 불신으로 인해 영혼까지 마모되는 자신을 구하기 위한 최선의 선택이었다. 화려한 서울시민에서 작업복을 걸친 오리농장의 강진군민이 되기까지 걸린 기간은 고작 수개월에 불과했다. 

그러나 권민도씨는 오리 축산을 주 농업으로 선택한 후 귀농지 문제로 여러 번의 좌절을 겪어야 했다. 축산업은 농가 전입이 어려운 종목이다. 산 좋고 물 맑은 마을에 축사에서 발생하는 냄새와 공해 오폐수 등은 청정한 시골 마을들로서는 최대의 적이다. 아무리 철저한 위생관리와 깨끗한 환경을 설명하고 약속해도 현지인들의 오해를 불식시키기 어렵다. 오랜 노력 끝에 권씨는 강진군의 이 아늑한 골짜기에 정착하게 되었다. 

그의 거대한 오리 축사에서는 불쾌한 냄새나 오염수 같은 것이 눈에 띄지 않았다. 축사에는 하얀 오리들이 소독처리 된 두툼한 왕겨바닥을 열심히 헤집고 있었다. 오리는 평균 일생이 45일에서 50일이다. 한 해에 예닐곱 번의 돌려짓기 농사가 평년작이다. 그런데 올해는 고작 다섯 번째 판을 입수했다. 예년에 비하면 형편없는 흉작이라고 한다. 

"귀농을 결심하고 여러 작목들을 알아보니 오리가 자본회수율이 가장 빠르더라. 일 년에  예닐곱 번, 투자와 회수가 반복되니까 큰 위험부담은 없지 않나. 축산업은 업종의 특성상 시골 깊숙이 갈수록 유리하고 또 판로 때문에 도시 가까이 있어야 할 필요도 없다. 그래서 기왕이면 정책적으로 뒷받침이 잘되어 있는 지역으로 가자, 그랬다."

귀농에 앞서 먼저 그는 귀농희망자들의 예비 쉼터인 '귀농의 집'에 입소하여 3개월 동안 필요한 정보를 취합하고 세부적인 계획을 수립하였다.

"오리 키울 장소 찾기가 힘들었다. 축산 농가의 애로점이다. 좀처럼 받아주는 마을이 없다. 법대로 내 땅 사서 내가 한다, 그럴 수는 없지 않나. 기존 마을주민들의 이해와 동의를 먼저 구해야 한다. 정말 천신만고 끝에 이렇게 고마운 마을 분들을 만났다." 

축산업을 묵인하는 대가로 거액의 기부금을 요구하는 마을이 많다고 한다. 그런데 이 곳 석동마을은 텃세는커녕 타지에서 온 젊은 농부에 대한 배려가 남달랐다. 오리 축사를 짓고 농장을 완성하는 과정에 많은 마을 분들의 도움이 있었다고 한다. 

"귀농희망자들이 전적으로 믿고 의지할 수 있는 지정 부동산중개업소 같은 것이 있었으면 좋겠다. 하하하. 장소를 못 찾아 헤맬 때 그런 간절한 생각이 들더라. 귀농 과정이 모두 힘들었지만 그 중에서도 믿을만한 땅을 구하는데 따르는 위험부담과 고통이 가장 컸다."

그의 오리 농업은 백프로 위탁영농체제이다. 그러므로 해당 의뢰 기업의 시스템과 조건을 전적으로 따라야 한다. 축사건축물 조성, 축사 위생조치, 사육 방식, 사료 종류와 양 조절까지 온갖 까다로운 규정과 요구조건을 맞춰야 한다. 그는 기자가 방문한 일시, 타고 온 차종, 차 번호 등을 꼼꼼히 축산 일지에 기록했다. 그만큼 오리 사육은 외부 오염과 전염병 등에 민감하다.

▲  권민도씨 오리 축사 중 일부 모습.
ⓒ 정미경

-강진을 선택한 이유에는 삼천만원이라는 정착자금도 크게 작용 했나?
"삼천만원이 큰 도움이 됐던 게 사실이다. 그렇지만 군의 적극적인 정책이 가장 와 닿았다."

-귀농결심 당시 가족들 반응이 궁금하다.
"아내가 어느 정도 동의해줬으니까 가능했다. 내가 9개월 먼저 내려와서 기본적인 준비를 갖춰 놓고 가족이 나중에 합류했다. 보시다시피 외딴 곳이라 집사람이 대화상대가 없어서 안타까운데, 요새는 아이들 학교에서 학부모를 위한 프로그램을 개설해 거기에 참여하고 있다."

-귀농 2년이 넘었다. 안정적으로 정착한 것처럼 보이는데?
"축산으로 기반을 잡았다 싶었는데 중국 FTA가 그렇게 쉽게 체결될 줄 몰랐다. 전세계에 유통 중인 오리 74%가 중국산이다. 그래서 한 가지 작목에만 의지하는 것이 위험부담이 크다는 걸 알았다. 서서히 다른 농업에도 눈을 돌릴 때가 온 듯하다."

-사람들의 귀농에 대한 관심이 최고조에 달해 있다. 선 귀농자로서 귀농을 생각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은?
"가장 먼저 주 작목을 정하고 나서 살 곳을 찾는 게 낫다. 축산이 외딴곳을 필요로 하듯이 작목 선정이 사는 곳을 좌우한다. 또 반드시 선도농가에서 일정기간 체험과 시찰을 할 필요가 있다. 귀농에 도움 줄 조력자를 확보하는 것도 큰 도움이 된다."

소농들이 뭉쳐서 판로 뚫었죠

귀농에도 적잖은 비용이 요구된다. 권씨의 경우 오리 축산업에 5억이 넘는 경비를 투자하고도 현재 복합영농을 구상중이다. 그렇다면 일정 경제력이 갖춰지지 않은 사람들의 귀농은 정말 불가능한 것일까. 각박한 도시에서 경제적, 심리적으로 상처받은 사람들이 소박한 귀농을 꿈꾸는 것은 무모하기만 한 것일까. 귀농으로 인한 시행착오와 고통은 고스란히 개인이 감당해야 할 몫인가. 강진에는 이런 귀농인들의 외로움과 고통을 함께 고민하고 해결해 나가자는 취지의 공동체가 있다.

"가령 도시에 제 연고를 갖고 있는 소비자가 열 명 있다고 치자. 그러면 여기, 사무국장 친구도 열 명이 있을 수 있다. 그렇게 각자 확보한 소비자를 우리가 공유하는 거다. 그러면 전체적으로 볼 때 모두의 열 제곱만큼의 소비자가 발생한다. 현지인들에 비해 귀농인들이 농업부문에선 약자이고, 대부분 소농이다. 같은 처지의 귀농인들끼리 서로 돕고 판로도 공유하자 그런 필요에서 만들어진 것이 '강진군귀농인협의회'다."

▲  강진군귀농인협의회 조병국 회장.
ⓒ 정미경
협의회를 이끌고 있는 조병국 회장의 설명이다. 마치, 중세 수도원에 흑사병을 피해 모여든 열 명의 사람들이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돌아가며 각각 열 개씩의 이야기를 지어 '데카메론'이라는 고전이 탄생한 이치와 비슷하다. 각 회원들이 확보한 도시 소비자들을 가상의 열제곱으로 확대하여 판로를 공유한다는 것이 '강진군귀농인협의회'의 취지다. 현재는 100가구 정도가 회원으로 참여하고 있다. 처음에는 귀농인들끼리 친목차원에서 시작한 모임이었는데 어느덧 다양한 귀농 관련 행사와 유익한 사업을 병행하는 귀농인 공동체로 발전했다. 

귀농정책자금 3천만원이라는 돈만으로 귀농인들의 모든 것이 해결되는 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그 지원금은 귀농과 동시에 조건 없이 주어지는 것은 아니다. 자기 자본 2천만 원, 농지 300평 이상의 영농을 시작하는 귀농인에 한해서만 지원되었다. 그나마 지금은 2천만 원으로 하향 조정된 상태다. 아예 경제력이 전무한 귀농인들에게는 정책자금도 해당 사항이 없는 이야기다. 귀농으로 인한 크고 작은 고통과 후유증을 공유하자는 취지의 귀농인협의회는 귀농을 훨씬 내실 있게 하는 중요한 공동체로 자리 잡아가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역귀성 비율도 10%에 달한다. 먼저 삶의 방편을 생각하고 서서히 다음을 결정해야 된다. 막연하게 어디 빈집 나온 거 있다고 거기에 기준을 맞추면 안 된다. 집은 별로 안 중요하다. 시골 빈집들 거의 다 새로 짓다시피 해야 될 만큼 허름한 집들인데 집을 우선순위로 정착지를 택하진 말아야 한다."

조병국 회장은 도시에서의 사업실패 후 도피성 귀농을 한 경우다. 귀농학교를 수료한 뒤 이곳에 정착해 벼농사, 무화과 농사를 짓는다. 올해는 태풍 때문에 무화과는 하나도 못 건지고, 벼또한 태풍 피해가 크다고 했다. 

조 회장은 협의회라는 든든한 공동체의 힘이 없었다면 태풍 맞은 벼가 전부인 부실한 가을 수확물을 두고 이렇게 여유 있게 웃을 수 없었을 거라고 말했다. 도시에서는 외롭고 힘들어도 아무도 옆에 없었는데 지금은 고통을 함께 할 이웃과 공동체가 있어 살아가는 데 큰 위로와 힘이 된다고.     

자료를 보니 강진군의 귀농인들 대부분은 화훼나 과수, 식품, 축산 등 특수작물이나 복합영농에 주력한다. 때문에 특수작물을 시도하는 귀농인들끼리의 교류와 협력이 큰 도움이 된다고 한다. 

"귀농 정착률이 높은 지자체에 정부차원의 파격적인 인센티브가 주어지면 좋겠다. 또, 귀농하려는 사람들이 언론의 과대포장에 경도되지는 말았으면 싶다. 농촌현실을 제대로 알려주는 언론의 심층적인 보도가 아쉽다. 누군가는 언론 보도를 보고 인생에서 중요한 귀농 결정을 하기도 할 테니까."

▲  강진군귀농인협의회 사무실 텃밭매장
ⓒ 정미경

정착금 3천만원보다, 더 중요한 걸 보세요

귀촌 인구를 제외한 60세 이하의 순수 귀농인구만을 집계했을 때, 강진군 귀농인구는 2006년과 2007년 두해동안 17가구, 51명이었던 데서 2008년 한해에만 66가구, 170명으로 늘어났다. 2009년 113가구 308명, 2010년 101가구 292명, 2011년 116가구 300명으로 꾸준한 상승세를 보이고 있다. 정착지원금이 삼천만원에서 이천만원으로 줄었던 작년에도 상승세는 멈추지 않았다. 

지금도 강진군에는 귀농을 문의하는 사람들이 줄을 잇는다. 강진군을 귀농지로 선택한 사람들 대부분은 주저 없이 "강진으로 오라"고 권한다. 여러분은 어떠한가.

미코출신 '절도혐의' 최윤영 나락으로...






미스코리아 출신 배우 최윤영의 근황이 전해졌습니다.


26일 한 매체에 따르면 최윤영이 약 한 달 전 고급빌라에서 나와 이전보다 작은 규모의 집으로 이사했다고 전해졌습니다.



보도에 의하면 최윤영은 기존의 보금자리였던 월세 300만원의 고급 빌라의 계약기간이 만료됨에 따라 자신의 새로운 보금자리를 찾았으며, 현재 자신의 특기를 살려 요가 강사 일을 다시 시작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이 소식을 접한 네티즌들은 “최윤영 다시 잘 살길”, “잘하셨어요 차근차근 다시 일어서면 되죠”, “힘내세요 파이팅!”, “안좋은 일은 잊고 다시 방송 복귀하셨으면 좋겠어요” 등의 반응을 보였습니다.



한편, 최윤영은 지난 6월 지인의 집에서 260만원 상당의 현금과 수표, 명품지갑 등을 훔친 혐의로 입건됐습니다. 검찰은 최윤영에 대해 절도죄가 아닌 점유이탈물 횡령죄로 판단, 우발적인 초범인 점을 감안해 기소유예 처분을 내린 바 있습니다. 





이용규선수 10첩반상에 깨가 쏟아지는 이유는?


◇ 이용규는 아내 유하나의 매력 포인트로 먼저 ‘아름다운 외모’를 꼽았다. ⓒ 유하나 블로그

기기아 타이거스  선수  이용규(28·KIA)가 ‘아내바보’로 등극했다. 

이용규는 최근 진행된 jTBC [쨍하고 공뜬날]과의 인터뷰를 통해 탤런트 출신 아내 유하나의 내조에 격한 고마움의 표시를 했다(25일 오후 9시40분 방영). 

이용규는 아내 유하나의 매력 포인트로 먼저 ‘아름다운 외모’를 꼽았다. 

"이승엽 선수 아내 이송정 씨도 미인인데 어떻게 생각하나"라는 질문에는 주저하지 않고 “제 와이프가 조금 위인 것 같다”고 답했다. 

이어 "아내는 나를 위해 한식 조리사 자격증을 따고 매번 10첩 반상을 차려주기도 한다"며 "KIA가 한국시리즈에 올라가면 아내를 꼭 시구자로 구단에 추천하고 싶다"며 아내에 대한 사랑을 전했다. 

이용규 아내 자랑 인터뷰를 접한 네티즌들은 "자랑할 만하다. 10첩 반상이라니!“ ”너무 부럽다“ ”야구 잘하면 미인을 차지하나“ 등의 반응을 나타냈다. 

지난해 12월 결혼한 이용규-유하나 부부는 평소 소셜네트워크를 통해 통해 깨가 쏟아지는 신혼 생활을 공개해 주위의 부러움을 사고 있는 대표적인 잉꼬커플이다. 

이용규는 지난 11일 서울 코엑스 오디토리움에서 열린 ‘2012 팔도프로야구 골든글러브 시상식’에서 유효표 351표 중 199표를 얻어 3명에게 돌아가는 외야수 부문 골든글러브를 수상했다. 당시에도 “정성스럽게 밥상을 차려주는 유하나 여신께 감사한다”고 소감을 밝힌 바 있다. 

올 시즌 125경기에 출장해 타율 0.283를 기록한 이용규는 득점 86개·도루 44개로 정규시즌 2관왕에 올랐다. 

한편, 이용규와 유하나는 최근 SBS 토크쇼 [강심장]에 패널로 출연해 막강한 입담을 과시하기도 했다.
아름다운 사랑이야기 오래오래 이어가세요~~~~ 결혼할때의 아름다운 한 때

2012년 12월 22일 토요일

여자들이 좋아라 하는 주얼리 티파니, 샤넬 압도하는 명품


여자 들이 받고 싶어하는 로망... 티파니 주얼리

싼것부터 명품까지 모두 성공시킨 럭셔리의 민주주의
저렴한 상품에도 최고 디자인 적용 멀티 스펙트럼 전략 
'블루 박스' 선물 포장 설렘의 아이콘 돼
"시장과 타협 않고 업계와 반대로 행동하는 전략. 장기적으로 보면 불황 타파에 효과적"
뉴욕하면 떠오르는 브랜드로 만들어
화려함·즐거움·창의성 녹아 있는 제품들
고객이 얼마의 돈을 쓰느냐와 상관없이 디자인의 진가 느낄 수 있도록 제작
다양한 가격대 제품으로 25년간 흑자 행진
소득 양극화 심해진 상황에선 최상위 제품군 호조
합리적 가격대 제품으론 '티파니 드림' 확산시켜 
중산층 자신감 회복하면 더 큰 비즈니스 기회 열려

175년의 역사, 불굴의 장인정신, 신분을 뛰어넘으려는 욕망의 결정체…. 명품 보석·시계 브랜드인 티파니(Tiffany)는 이런 수식어만으로는 설명이 힘들다. 고가(高價) 브랜드의 대명사이면서 뉴욕 증시에서 코카콜라·월마트·애플·마이크로소프트(MS) 등과 더불어 미국 소비 흐름을 보여주는 핵심 지표이기 때문이다.

티파니의 매출 실적 등에 따라 '본격 소비 시즌이 시작됐다'거나 '소비 심리가 얼어붙었다' 같은 진단이 내려진다. 주가·고용·소비지수 같은 공식 지표보다 더 빠르고 정확하게 실물 경제를 비추는 '미국 소비 시장의 가늠자' 역할을 하는 셈이다.

1837년 뉴욕의 한 팬시 문구점으로 출발해 지난해 36억8000만달러(약 3조9700억원)의 매출을 올려 샤넬(18억6000만유로·약 2조7000억원·2010년 매출액)을 압도하는 글로벌 명품 거인인 티파니에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 비결은 수십억원대의 초고가 보석부터 중저가 은(銀) 제품까지 폭넓은 상품 가격대를 구축·판매하는 전략적 접근이다. 티파니는 명품 보석 브랜드로는 매우 이례적으로 10만원대의 은 목걸이 같은 저가 제품을 여럿 갖고 있다.

저가와 고가품을 동시에 공략하는 '멀티 스펙트럼 전략'은 1999년부터 수장(首長)을 맡고 있는 마이클 코왈스키(Michael Kowalski·60) 회장 겸 CEO의 작품이다.

Weekly BIZ는 이달 3일 뉴욕시 맨해튼 23번가에 있는 티파니앤코(Tiffany & Co) 14층 접견실에서 코왈스키 회장을 만났다. 1983년 티파니에 입사한 그는 CEO 취임 후 IT 버블 붕괴와 글로벌 경제위기 속에서도 매년 흑자 행진을 할 뿐 아니라 까르티에·몽블랑·반 클리프 아펠 같은 유명 브랜드들을 보유한 스위스 명품그룹인 리치몬트(Richemont)에 이어 세계 보석·시계 업계 시장 점유율 2위로 티파니를 키운 '마술 경영'의 주인공이다.

지난해에만 월급·스톡옵션 등을 포함해 898만달러(약 97억원)의 총보수를 받은 세계 보석업계의 최고 CEO인 그의 첫인상은 럭셔리 브랜드 CEO라기보다 소탈한 이웃집 아저씨 같았다. 손목시계와 소매단추(cuff links)를 제외하면 일절 장신구조차 하지 않고 있고, 구두와 넥타이 등도 명품과 거리가 먼 평범한 제품이었다.

산호 채굴 금지 같은 자연보호 운동과 생태계 보전 관련 환경 단체의 열성 회원이라고 밝힌 코왈스키 회장은 "자연이야말로 최고의 디자이너이다. 자연에서 발견한 클래식한 모양들에서 디자인의 영감을 많이 얻는다"고 했다.

그는 특히 총매출의 20% 정도를 차지하는 은 세공품에 대해 강한 자부심을 보였다.

"은 제품은 럭셔리에 대한 티파니의 민주적인 시각을 상징합니다. 장인 정신으로 아름답게 세공된 은 제품은 고급 다이아몬드 제품 못지않은 가치를 담고 있어요."

이런 자신감은 그가 강력 추진하고 있는 '디자인 중심(design driven) 정책'에서 유래한다. 코왈스키 회장은 세계 최고의 디자이너들을 영입한 다음 그들에게 먼저 '은' 제품을 만들어줄 것을 주문한다. 대다수 보석 디자이너들이 초고가 원석을 다루며 솜씨를 뽐낼 때 티파니는 거꾸로 저렴한 상품에 최고 디자인을 적용한 것이다.

'하트 목걸이(러빙 하트), 티어 드롭(눈물이 떨어지는 모습을 연상시키는 모양), X자 모양 펜던트, 열쇠 디자인 펜던트…' 등 티파니 하면 떠오르는 제품은 모두 은제품으로 제작돼 있다. 백금과 다이아몬드로 만든 제품도 있지만 디자인은 모두 공유한다. "실버는 매우 훌륭하고 럭셔리한 금속 소재입니다. 합리적 가격으로 제품을 제공함으로써 '티파니 드림'을 가진 고객들의 열망을 만족시키려 합니다."

코왈스키 회장은 1시간여 동안 인터뷰 내내 입가에 옅은 미소를 띠며 차분하게 말했다. "티파니는 화려함, 즐거움, 창의성, 그리고 전 세계 사람들이 뉴욕 하면 떠올리는 모든 것과 상통합니다."

그는 수치 등 정확한 대답이 필요할 때에는 배석한 마크 애런 IR(기업설명)담당 부회장에게 반드시 확인했다. 그가 만면에 환한 미소를 지으며 들뜬 목소리로 답한 순간은 티파니의 푸른색 선물 포장 상자인 '블루박스(blue box)' 에 대한 질문을 받았을 때였다. '블루박스'가 여성 고객에게 주는 설렘을 설명하는 그의 얼굴은 마치 선물을 받는 사람처럼 들떠 있었다.

마이클 코왈스키 회장은 럭셔리 업계에서 보기 드문 장수(長壽) CEO다. 1983년 티파니에 입사한 그는 고속승진해 1999년 CEO에 취임했고 2002년부터는 회장을 겸하고 있다. 21년간 루이비통을 이끈 이브 카셀을 제외하고 글로벌 명품 업계에서 10년 이상 장수한 CEO는 코왈스키 회장이 유일하다. 길어야 5년 정도 CEO로 일하는 업계 관행에 견줘 보면 매우 이례적이다.

1987년 티파니의 뉴욕 증시 상장을 주도한 그의 트레이드 마크는 이후 25년 동안 단 한 해도 적자를 내지 않는 '내실 경영'이다. 코왈스키 회장은 "적절하게 공격적이었으나 무모한 적은 없었다"며 '중용(中庸)'을 키워드로 꼽았다. 그는 "좋은 성과를 달성하려면 장기적 안목과 강점에 대한 집중력, 강력한 비전 이 세 박자가 필요하다"고 했다. 푸근한 인상이었지만 안경 뒤로 보이는 그의 눈매는 매처럼 날카롭게 빛났다.

 미국 뉴욕 맨해튼의 중심가인 5번가에 자리한 티파니 플랙십 스토어를 찾은 고객(가운데)이 점원(왼쪽)의 안내를 받으며 보석을 쇼핑하고 있다. / 블룸버그
보석 업계의 '루스벨트'. "반대를 반대하라"

―최근 같은 극심한 글로벌 불황에서도 흑자를 내는 비결이 궁금하다.

"항상 우리가 가장 잘하는 것에 초점을 맞췄기 때문이다. 소비자의 신뢰를 얻지 못한 다른 분야로 비즈니스가 분산되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어느 한 부분의 매출이 좋다고 해서 시장과 적당히 타협하면서 성장하는 것을 경계한다. 시장과 함께 가는 게 아니라 시장을 '주도'할 전략을 적극적으로 찾고 실행한다."

―매출 증대는 CEO의 가장 중요한 목표 중 하나 아닌가. 매출을 포기하고라도 시장과 타협하지 않는다는 말인가.

"중요한 것은 브랜드가 어떻게 성장하느냐다. 어떤 브랜드 이미지와 인식을 주는가가 더 중요하다. 최근 30년간 티파니의 매장은 더 화려해졌고, 디자인은 훨씬 개선됐다. 우리의 목표는 '어제보다 나은 오늘'이다. 단기적인 이익을 포기하더라도 브랜드 이미지를 높이는 게 필요하다."

'반대에 반대하는'(long term recession-busting strategy·티파니의 독특한 장기적 불황 타파 전략으로 업계 행태와 반대로 가는 것) 그의 결단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는 2002년 회장 선임 직후 단행한 '가격 재조정'이다. 1999년 CEO를 맡은 후 그는 티파니 고유의 정체성을 강화한 '리턴 투 티파니(Return to Tiffany·명품 브랜드 '로고'처럼 단번에 티파니 제품임을 알 수 있도록 제품 앞면에 '티파니' 글자를 새긴 것)' 제품들을 내놓았다.

'중산층의 필수품'으로 불린 이 제품은 1997년 7280만달러에서 5년 만에 1억8990만달러로 매출이 67% 정도 늘었다. 이렇게 잘나가는 시점에서 그는 매장과 디자인을 리뉴얼하고 브랜드 이미지를 깎아내릴 수 있는 일부'초저가' 제품 판매를 중단시켰다. 매출 증대보다도 '10대(代)용 브랜드'로 전락하는 걸 원치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 전략은 얼마나 효과적이었나? 반대도 상당했을 텐데.

"직원과 고객에게 어떤 비전을 제시하느냐가 중요하다. 우리가 시도한 일들에 대해 업계에선 의혹과 우려, 반대도 했지만 결국 우리가 옳았다는 게 증명됐다. 가격 재조정 정책 실시 후 팔로마 피카소 라인(2005년), 프랭크 게리 라인(2006년) 등을 잇달아 내놓으면서 고급 이미지를 굳혔다. 요즘 같은 소득 양극화 시대에 매출의 견인차는 이런 고급라인이다. 우리는 '저가'와 '고가' 양 부문에서 티파니만의 독보적 위치를 구축했다. 또 제품 제조를 모두 인하우스(in house·내부 제조)로 대체하겠다는 정책을 10년 전에 내놓고 이를 실행했다. 20년 전, 티파니의 자체 제품 제작 비율은 약 20%였으나 지금은 70%에 이른다."

이런 '뚝심 경영'으로 인해 그는 '보석 업계의 루스벨트'로 불린다. 프랭클린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이 1936년 매디슨 스퀘어 가든 연설에서 "미국 역사에서 한 사람(루스벨트 자신)을 반대하는 힘이 이토록 결집된 적은 없었다. 나는 그들의 증오를 환영한다"고 외쳤던 장면과 코왈스키 회장을 동일한 선상에 두는 것이다. 루스벨트 대통령이 '뉴딜 정책'으로 대공황에서 탈출했듯, 코왈스키 회장 역시 과감한 재투자와 장기적인 브랜드 관리로 탁월한 위기 대응 리더십을 발휘했다는 것이다.

그의 '장기적 관점'은 불황 때 특히 유효했다. 2008년 미국발 금융위기 충격으로 경영을 긴급 긴축해야 했을 때, 자체 생산 덕분에 분량을 탄력적으로 줄일 수 있었다. 하지만 경쟁 브랜드들은 매년 가장 큰 수익을 내는 추수감사절 시즌에 '재고 세일' '눈물의 세일'을 하며 브랜드 이미지 하락을 감수해야 했다.

"가격의 민주화, 제품의 과학화, 디자인의 자기(自己)화를 구축하라"

―세계 5대 보석 브랜드 가운데 티파니를 제외하면 모두 프랑스 브랜드다.

"티파니는 사실 하나의 브랜드이자 뉴욕을 상징한다. 제품 품질도 뛰어나지만 화려함, 즐거움, 창의성 그리고 세계 사람들이 뉴욕 하면 떠올리는 모든 것과 일맥상통한다. 우리 브랜드는 관점이 매우 미국적이다. 티파니는 럭셔리에 대한 민주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다. 다른 유명 브랜드보다 더 다양한 가격대와 소재의 제품들을 접할 수 있다. 가장 중요한 건 훌륭한 디자인과 위대한 장인(匠人·craftsmanship) 정신이라고 생각한다. 아름답게 다듬어진 실버(silver) 주얼리는 장엄한 다이아몬드만큼이나 아름다울 수 있다고 믿는다."

―저렴한 가격대의 '엔트리(entry·'시작한다'는 의미로 브랜드 접근성을 높인 제품들)' 제품군이 상당히 많은데.

"이 모든 것이 디자인을 통해 가능하다. 엔트리 제품 역시 티파니 유산의 일부며, 고객이 얼마만큼의 돈을 쓰는가가 아닌, 얼마큼 위대한 디자인의 진가(眞價)를 알아보는지를 중시한다."

―하지만 2008년 등 불황기엔 엔트리 제품이 많은 이윤을 내지 않았다.

"이는 항상 우리의 도전 과제 중 하나였고, 소득 양극화가 심해진 올해는 특히 그렇다. 최상위 제품군에서 호조를 보인 반면 합리적 가격 제품군에서는 고전했다. 하지만 우리는 장기적인 관점을 고수하며 제품의 모든 영역에 걸쳐 투자를 지속하고 있다. 소득 양극화가 지속되더라도 고가 제품군에서 호조를 보이기 때문에 우리에게 위협이 되지 않는다. 실제 최근 1억5000만원이 넘는 고가(高價) 제품이 굉장히 잘 팔린다. 여기에다 중산층 혹은 희구 소비층(aspirational customers)이 자신감을 회복하면 이는 더 큰 기회가 된다."

'저가'와 '고가' 양립 정책에 따라 중저가 실버라인 매출 비중이 최소 20% 이상 차지하도록 유지시킨다. 명품 브랜드 '엔트리' 라인이 전체 5% 이상 차지 하지 않는 것과 비교하면 상당한 투자다.

―럭셔리 브랜드인 동시에 혁신 브랜드라는 생각이 든다. 얼마 전 소개된 루베이도(Rubedo) 라인의 경우 보석 브랜드에서 상상하기 어려운 메탈 하이브리드를 사용했다. 옐로 다이아몬드를 널리 퍼뜨린 것도 티파니의 공(功)이다.

"금속소재를 전문으로 다루는 티파니의 엔지니어들이 루베이도를 탄생시켰다. 과학과 예술이 어우러진 멋진 사례이다. 또 상당량의 옐로 다이아몬드에 투자할 자금력을 갖고 있기에 우리는 그 기회에 도전했다."

―티파니 제품의 절반은 예술이고 나머지 절반은 과학이라고 볼 수 있나?

"물론이다. 위대한 디자인의 결합이다. 훌륭한 금속, 다이아몬드의 광채와 모든 아름다운 요소들을 극대화하는 커팅법(cutting skill) 등의 관점에서 본다면 과학의 조합이다. 또 디자인과 과학을 결합해 여성들이 착용할 수 있는 그 무엇인가로 회생시키는 장인 손놀림의 관점에서 보면 예술이다. 얼마나 매력적인가!"

직원에게 항상 "이곳을 사랑하는가"라고 물어라

―많은 기업은 추락의 시기를 갖고 있다. 특히 정상에 오래 있던 기업일수록 현실에 만족하기 쉬운데.

"그래서 1만여명의 임직원에게 회사에 대한 '가치'와 '유산'을 이해하도록 힘쓰고 있다. 한 예로 누구나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 가면 갤러리에 전시된 티파니의 위대한 작품을 볼 수 있다. 상장회사로서 '성장'은 의무라는 것을 임직원들이 인식하고 있으며, 우리는 회사를 성장시킬 기회를 찾고 있다. 브랜드의 위엄을 유지하지 못한다면 단기 이익은 가능해도 장기적 관점에서는 재앙일 것이다."

―직원들과 이런 비전을 공유하기 위해 어떻게 그들을 동기 부여하나?

"직원들과 무척 자주 이야기한다. 티파니에는 매우 강력한 조직문화가 형성돼 있다. 종종 새 임직원에게 '당신이 어느 부서에 근무하건 만약 당신이 뉴욕매장 혹은 다른 여느 티파니 매장을 방문했을 때 보이는 것들에 대해 흥분이 되지 않고 제품에 대한 애착이 없으며, 자긍심이 느껴지지 않는다면 아마도 당신은 자신에게 맞지 않는 회사에 다니고 있는 것'이라고 말한다. 회사에 대한 '애정' 그리고 본인의 일에 대한 '열정'을 공유해야 한다. 우리 비즈니스의 핵심을 생각해 보면 미(美)를 창출하고 우리 고객들의 삶에 아름다움을 실현하는 것이다. 우리는 장치나 기기를 만들지 않는다. 대신 고객에게 감성과 기대감을 심어준다. 일에 만족도가 높아지면서, 직원들은 이 일이 생계유지 수단이 아닌 봉사활동(labor of love) 같은 행복한 일로 바뀌고 있다는 걸 느끼게 된다."

―드비어스 등 내로라하는 다이아몬드 회사를 거쳐 티파니로 온 직원들은 "'보석 업계 종사자들의 종착역은 티파니'이다"고 한다. 1위 회사로서 직원들에게 보상이나 대우는 어떤가?

"직원들에게 공평한 보상을 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그들이 회사에 큰 자부심을 갖고 있다고 해서 공정한 보상을 하지 않는다면 절대 핑계거리가 될 수 없다. 회사에 대한 직원들의 애정과 별도로 회사와 직원 간에 이행해야 할 '약속'이 있다. 보상은 궁극적으로는 업계 최고의 디자이너들과 세일즈, 마케팅 분야 최고의 인재를 뽑는 데 매우 중요하게 작용하는 부분이다."

―인생의 절반을 티파니에서 보냈는데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은?

"1987년 회사 상장(上場)과 올해 창립 175주년을 맞았을 때다. 평생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한 경험이었고 그 순간을 잊을 수 없다. 무엇보다 2008년 경제위기와 이후 불경기를 겪으며 회사가 더 단단해졌다는 걸 느꼈을 때이다. 브랜드의 지속적인 회복력에 놀라움을 느낀다. 매번 티파니라는 브랜드가 이를 견뎌내고 다시 일어서는 모습을 볼 때 큰 위로와 보상이 된다." 
175년이라 지속되온 기업, 한번 꼭 받아 보고 싶은선물... 여러분들도 티파니에서 선물을 받아 보고싶지 않은가?
마이클 코왈스키(Michael Kowalski) 회장은
출생 : 1952년 미국

학력 : 펜실베이니아대학 학사(경제학), 하버드대 경영대학원(MBA)

경력 : 티파니 CEO(1999~현재) 티파니 회장(2002~현재)
        뉴욕 멜론은행 이사회 멤버(2007~현재)
        페어몬트호텔&리조트 이사회 멤버

기타 : 2011년 총수입 898만달러(약 96억원\연봉 및 스톡옵션 등 포함)

리니지, 바람의나라 개발자=송재경을 주목하는 이유

송재경의 네번째 도전 600억 대작 프로젝트 아키에이지, 1월2일 출시


온라인게임 '천재 개발자'로 불리우는 송재경의 네번째 도전이 시작된다.

리니지와 바람의나라로 온라인게임의 거장으로 우뚝선 송재경의 신작게임 '아키에이지'가 오는 1월2일 정식 론칭을 앞두고 있다. 아키에이지는 송재경이 개발하는 게임이라는 점 만으로 단숨에 최고 기대작 반열에 오른 대작 다중접속역할수행게임(MMORPG)이다.

중국 최대 게임업체 텐센트는 지난 2010년 무려 5천만달러(약 600억원)의 계약금을 지불하고 아키에이지 중국 판권을 확보했다. 이 계약금은 국내 온라인게임의 최고 수출금액으로 이 기록은 아직도 깨지지 않고 있다.



1차 테스트 단계였던 아키에이지를 5천만달러라는 거금을 주고 확보했다는 점에서 업계는 텐센트가 너무나 공격적인 움직임을 보인 것이 아니냐는 분석이 나오기도 했다. 이에 텐센트는 '송재경'이란 이름은 그만한 베팅을 할만한 인물이라고 판단했다고 설명했다. 중국에서도 국내 게임 개발자의 실력을 알아봤던 것이다.

송재경이 개발한 바람의나라와 리니지는 10만명의 동시 접속자를 이끌 정도로 국내에서 크게 흥행했다. 동시 접속자 수보다 더 주목해야 할 부분은 그가 만든 게임으로 한국의 온라인게임 스타일이 바뀌었다는 점이다.

◆최초와 최고의 수식어가 따라붙는 송재경의 도전들

송재경은 아키에이지를 개발하기 이전에 바람의나라와 리니지, 그리고 XL레이싱까지 총 3종의 게임을 개발했다.



지금도 넥슨코리아에서 서비스중인 바람의나라는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MMORPG다. 1996년 2월에 첫선을 보인 바람의나라는 최고 13만 명의 동시 접속자 수를 기록할 정도로 큰 인기를 얻었다.

바람의나라가 등장한 1996년, 한국은 텍스트 머드게임 단군의땅이나 쥬라기공원 등이 인기를 끌고 있었다. 텍스트가 주를 이루던 게임시장에 비주얼게임의 등장은 충격적이었다. 바람의나라 흥행으로 넥슨은 국내 뿐만 아니라 일본 최대 온라인게임 퍼블리셔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다.

바람의나라가 그래픽을 보여줬다면 리니지는 가상 사회를 열었다.



1998년에 등장한 리니지는 MMORPG라는 장르의 특성을 제대로 살린 최초의 게임으로 평가받는다. 당시 영화 '매트릭스'로 유행했던 '가상 사회' 열풍을 구체화시켰다는 평가다. 리니지가 가상 사회라 불릴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온라인게임 사상 처음으로 권력 요소를 게임 내에서 구현해냈기 때문이다.

리니지는 군주와 기사의 주종관계를 구조로 한 집단인 '혈맹'(다른 온라인 게임의 '길드')을 중심으로 벌어지는 권력다툼을 그렸다. 그리고 본토에 존재하는 성을 점령할 수 있는 '공성전 시스템'을 도입하고 승리자는 '성주'가 되어 게임 내 운영 권한 일부를 받을 수 있었다.

리니지는 권력을 원하는 사용자들과 그 주변인들, 그리고 순수한 게임 마니아들까지 얽힌 사회를 자연스럽게 만들어냈다. 그 결과 매년 1천억원 이상의 매출을 거둘 정도로 폭발적인 인기를 얻었다. 캐릭터 레벨 업 외엔 별다른 콘텐츠가 없었지만 게임 내에서 이용자들 스스로 이야기를 만들어나가는 '유저 내러티브'라는 신조어까지 만들어냈다.



그리고 그의 세번째 시도는 지난 2006년에 선보인 정통 레이싱게임 'XL레이싱'이었다. 콘솔게임에서 짜릿한 손맛을 건네주던 레이싱게임을 PC 온라인에서도 구현하겠다는 도전이었다. 송재경은 엄청난 굉응과 함께 포뮬러 레이싱을 XL레이싱을 선보였다. 

하지만 이 게임은 높은 PC사양과 불안정한 네트워크를 극복하지 못했다. 그럼에도 XL레이싱은 PC 온라인게임이 비디오게임에 비해 조악하다는 편견에 반기를 들었던 게임이라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 이후 국산 온라인게임은 그래픽과 조작을 향상시켜 한층 업그레이드됐다.

◆MMORPG 14년만의 후속작 그리고 가상 사회의 진화

송재경의 네번째 도전은 오는 1월 2일 론칭될 아키에이지다. 아키에이지는 송재경이 XL레이싱 이후 6년, 리니지 이후 14년 만의 후속작이다. 아키에이지가 송재경의 14년 만의 후속작이라 불릴 수 있는 이유는 리니지의 가장 큰 특징인 '가상 사회'를 보다 진화시켜 구현해냈기 때문이다.

리니지 이후 온라인 게임은 '가상 사회'라기 보다는 '온라인 테마 파크'이라는 말이 어울리고 있다. 게임 개발사가 제공하는 콘텐츠를 다른 사람과 함께 이용하는 것을 게임 내 목적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테마파크형 게임의 대표작은 블리자드가 개발한 월드오브워크래프트다.

14년 전 '가상 사회'를 만들어낸 송재경 대표는 이런 테마파크형 게임에 반기를 들었다. 다시금 정통 MMORPG로 회귀를 선언한 것. 그는 아키에이지로 보다 진화된 가상 사회를 만들어냈다. 넓은 대륙에서 사용자들은 직접 농사를 짓고, 광석을 캐고, 나무를 베어 집을 지을 수 있다.



사용자들이 지은 집들이 모여 마을이 되고 그 마을을 둘러 성벽이 쌓아 '성'을 만든다. 이로 인해 아키에이지는 지극히 현실적인 '중세 판타지 가상 사회'를 만들어낸다. 권력 하나만으로 가상 사회를 만들어낸 것이 리니지라면 아키에이지는 권력은 물론, 그에 따른 '생활'까지 게임 내에서 구현해 냈다.

송재경 스타일의 게임은 모래 사장에서 자유롭게 자신이 원하는 모양의 모래성을 쌓으며 노는 '샌드 박스'에 가깝다. 게임 개발사가 제공하는 것은 사용자들이 놀 수 있도록 모래 사장과 함께 모래성을 쌓을 수 있는 도구들이다. 물론 다른 사용자가 만든 모래성을 부숴버리는 것도 가능하다.

최근 온라인게임, 특히 MMORPG에서 송재경 스타일의 게임들이 줄이어 개발소식을 전하고 있다. 최근 네오위즈게임즈의 중흥을 책임진 블레스를 비롯해 C9 개발자 김대일PD가 진두지휘하고 있는 '검은사막' 등이 송재경 스타일의 새로운 경향을 증명이라도 하듯 게임 내 소셜과 상호작용을 강조하고 있다.

기존 국내 MMORPG시장을 주름잡았던 테마파크식으로는 더 이상 게이머들의 눈높이를 맞추기 어렵다는 판단이 힘을 얻고 있다는 증거다. 

송재경 엑스엘게임즈 대표는 "게임은 즐거워야 한다. 그런데 개발사가 제공하는 즐거움만 맛볼 수 있다면 무슨 의미가 있겠나"라며 "즐거움은 필연적으로 스스로 만드는 것이다. 아키에이지가 개인의 가치를 강조하고 선택권을 확장시킨 것은 더 다양한 재미를 구현하기 위함이다. 개인의 자유를 존중할 때, 게임의 흥행도 성공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박근혜 당선인이 온라인 셧다운제 지지의사를 폈는데 어떻게 될지도 궁금해지지 않을까요?

2012년 12월 21일 금요일

강남 타워팰리스 박근혜에 몰표


18대 대선 결과 분석해보니
타워팰리스서 문재인 853표 … 강남 진보 표 2배로
문, 강남 3구서 43.1% 득표 선전
박, 총선보다 664만 표 더 얻어
부재자 투표 문이 5.2%P 앞서


아 나라가 어떻게 될려나, 박근혜가 당선되었다는데.... 강남 부자표 얻어서 좋겠다는 글이 
떴구나 아무튼 박근혜 대통령 당선인은 최종 개표결과 1577만3128표를 얻어 득표율 51.6%로 절반을 넘겼다. 1971년 7대 대통령선거에서 아버지 박정희 전 대통령(53.2%)에 이어 41년 만에 ‘과반 대통령’이 됐다. 이런 박 당선인의 득표율은 박 전 대통령이 1967년 6대 대선에서 얻은 51.5%와 비슷하다. 본인이 새누리당 비상대책위원장으로 직접 지휘했던 4·11 총선의 비례대표 정당득표(율)보다 664만여 표(8.8%포인트)를 더 얻은 것이다.

 박 당선인은 전국 시·도별 개표결과에서 서울과 호남을 제외한 전 지역에서 승리했다. 수도권 중 경기·인천, 고향인 대구·경북(TK), 부산·경남(PK), 대전·충남·충북, 강원, 제주에서 모두 민주통합당 문재인 후보를 앞섰다. 야당의 강세지역인 호남에선 문 후보가 광주(92.0%), 전남(89.3%), 전북(86.3%)을 석권했지만 박 당선인도 33만6185표를 얻어 최종 10.5%라는, 호남 두 자릿수 득표 기록을 세웠다. 호남에서 문 후보에게 250만6221표를 뒤졌지만 TK·PK 등 영남에서 313만여 표 차이를 벌린 게 승인이었다.

 최대 격전지는 수도권이었다. 서울에선 문 후보가 3.2%포인트(20만3067표) 차로 앞섰지만 박 당선인은 인천에서 3.5%포인트(5만8387표), 경기에서 1.2%포인트(8만6831표) 차로 승리했다. 그리고 유권자 수론 서울의 7분의 1인 강원에서 서울 표차보다 많은 22만2006표(24.4%포인트) 차이로 대승하고, 대전·충남·충북에서도 28만3099표 차를 벌리면서 전국 승리를 확정 지었다.


 서울에선 문 후보가 25개 구 가운데 강남·서초·송파·강동·용산 등 5개 구를 제외한 20개 구에서 모두 승리했다. 4·11 총선 때 야권이 승리한 지역에서 모두 이긴 것이다. 특히 문 후보는 ‘강남 3구’에서 43.1%(박 당선인 56.5%)의 득표율을 올리는 등 선전했다.

 2007년 17대 대선 때 이 지역에서 정동영 후보의 득표율은 17.6%(이명박 62.5%)에 불과했다. 당시 정 후보보다 25.5%포인트나 득표율을 끌어올린 것이다.

 
타워팰리스 자료사진=노컷뉴스
문 후보는 강남 타워팰리스가 있는 도곡2동 3·4투표소에서도 853표(14.7%)를 받았다. 17대 대선에선 정동영 후보가 타워팰리스 A동에서 88표를 받는 등 5.7%밖에 득표하지 못했다. 종합부동산세 세율 인상을 공약으로 내건 문 후보가 강남에서 40% 득표율을 올린 것은 전문직·고소득층이면서도 이념적으로는 진보성향인 이른바 ‘강남 좌파’ 유권자의 지지를 받은 것 때문으로 해석된다. 서울지역에서 통합진보당 이정희 전 후보의 지역구인 관악구에서 가장 큰 격차(18.8%포인트, 박 당선인 40.4%, 문 후보 59.2%)가 났다. 반면 박 당선인을 선택한 용산구는 지난 총선에 이어 ‘강북의 강남’으로 자리잡았다.

 민주통합당 측이 출구조사 이후 막판 역전을 기대했던 부재자 투표에서도 문 후보는 52.1%로 박 당선인(46.9%)을 앞섰으나 격차는 그리 크지 않았다. 2002년 16대 대선 때 노무현 전 대통령은 부재자 투표에서 64.1%를 득표해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30.6%)에게 33.5%포인트(26만3354표)를 앞섰다. 이번엔 박 당선인이 격차를 5만 표(5.2%포인트) 차이로 줄인 것이다. 노 전 대통령의 2007년 정상회담 서해 북방한계선(NLL) 포기 발언 여부가 막판 대선 쟁점으로 떠오르면서 부재자의 절반이 넘는 20대 군인·경찰에게 영향을 미친 것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사상 처음 도입된 재외국민 투표의 경우 해외 영주권자들이 보수성향이 강해 새누리당에 유리할 것이란 분석이 있었지만 18대 대선 결과(문 후보 56.7%, 박 당선인 42.8%)는 예상과 달랐다. 주재국 공관을 직접 방문해야 하는 투표의 어려움 때문에 20~40대 유학생·주재원 등 일시 국외체류자가 주로 투표에 참여하면서 첫 재외국민 투표에선 야성(野性)이 더 강하게 나타났다.
 젊은 사람들은 문재인 뽑았는데 나이 든 분들이 박근혜 당선인에게 몰표하여서 이렇게 결과가 나왔는데 앞으로 5년 우리나라가 어떻게 될까요?